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르후 전투 (문단 편집) ==== 서로군의 전멸(사르후 전투) ==== [[파일:external/infiniteartcentre.com/cropped-Chinese-Painting_Battle-of-Sarhu-1.jpg]] 3월 1일,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다. 누르하치는 즉시 8남인 [[숭덕제|홍타이지]]에게 [[팔기군|팔기]] 중 2기를 내주어 계번성을 구원하도록 하고, 실질적인 주력이었던 6기의 45,000명을 스스로 이끌고, 20,000명의 병사가 대기하고 있었던 사르후의 명군 진영을 급습했다. 사르후에 남은 20,000명의 명군은 계번성으로 간 병력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대기하는 부대였고 주로 화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총사령관도 자리를 비운데다가 대기군이라는 생각 탓에 방심하고 있었으며, 저녁이 되자 [[황사]]바람까지 불어닥쳤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던 20,000명의 명군은 횃불을 밝혔고, 덕분에 후금군 45,000명은 어두컴컴한 쪽에서 불길이 있는 곳으로 들이닥치는 셈이 되었지만, 반면에 20,000명의 명군은 어둑어둑한 사방에서 화기를 사용할 겨를도 없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적군과 격전을 벌어야 했다. 이때 후금군이 화살을 쏘아 명군에 퍼붓기 시작했는데 >'''쏘아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라는 기록까지 있을 만큼, 후금군에게 있어 이 싸움은 너무나도 싱거운 일이었다. 후금군은 불꽃이 있는 쪽으로 그저 화살을 쏘기만 하면 그만이었고, 혼란스러운 명군에게 기병으로 돌진해서 격파를 하면 끝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명군도 나름 화살과 총포를 쏘아 이에 대응했지만, 급습을 당해 정신이 없는 판에 보이지도 않는 어둠 속에 사격을 하는 일은 절망만을 가져다 주었다.[* 현대에도 야간사격은 굉장히 어렵다.] 명군의 화살과 총포는 후금군을 맞추기는 커녕 모두 버드나무에 맞았기에 아무 소용없었다는 기록도 있다. 명군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악조건에서 싸움을 벌였고, 결국 전멸했으며 사방으로 뿔뿔히 흩어졌다. 계번성으로 향하던 두송 또한 후금의 매복군을 만나 고전하던 중에 이 참담한 소식을 들었다. 순식간에 명군의 전 장병들에게 패전 소식이 확산되어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누르하치는 기회를 놓칠세라 승리한 6기를 빠르게 움직여 두송 휘하의 군대 10,000명의 후방을 들이쳐서 맹공하기 시작했다. >'''횡시(橫屍)가 산야를 덮었다. 피는 흘러 도랑을 이루었다. 기치(旗幟), 기계(器械), 그리고 죽은 사졸들이 혼하를 덮으며, 마치 물이 없는 듯했다.''' 결국 후금군의 격렬한 공격으로 두송이 이끌던 10,000명의 명군까지 문자 그대로 전멸했다. 사령관 두송도 분전을 펼치다가 활에 맞아 죽었다. 이때 두송의 명군은 30,000명의 병력 중 제대로 살아남거나 도주한 병력이 극소수일 정도로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두송의 패잔병들은 이 충격적인 패배를 맛보고 인근의 쇼킨 산으로 달아나자, 누르하치는 3월 1일 밤이 지나가기 전까지 [[팔기군]]을 이끌고 추격해 쇼킨 산을 뒤지며 명군 패잔병들을 사냥했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두송에게 승리를 거두고 패잔병들을 학살하던 바로 이때, 마림의 북로군이 상간하다에 도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